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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소개

 

족보(族譜)는 한 가문(家門)의 조상(先祖)부터 조상(祖上) 대대(代代)로 그리고 후세(後世)에 이르기까지 씨족(氏族)의 혈통(血統) 세계(世系)와 모든 생활사(生活史)를 기록(記錄)하고, 조상(祖上)의 지난날의 업적(業績)과 혈통관계(血統關系)를 후세(後世)에 잘 알리며, 동족혈통간(同族血統間)의 정감(情感)과 단결(團結)을 돈독(敦篤)하게 하고 숭조목종(崇祖睦宗)의 근원(根源)이 되도록 하는 가문(家門)의 보감(寶鑑)이다.

또 족보(族譜)는 씨족(氏族)과 가문계통(家門系統)을 기록(記錄)하는 서책(書冊)이며, 씨족(氏族)의 혈통 근원(血統 根源)과 선조(先祖)의 사적(事蹟)을 소상하고 바르게 기록(記錄)하여 후세(後世)에 전수(傳受)하는 유일(唯一)한 수단(手段)이기도 하다.

이러한 서책(書冊)을 족보(族譜), 세보(世譜), 가보(家譜) 등으로 부르며 규모(規模)에 따라 대동보(大同譜), 파보(派譜), 가승보(家承譜) 등으로 구분(區分)하여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와서는 족보(族譜)를 제대로 갖춘 집안이 양반계급(兩班階級)의 후예(後裔)로 인정(認定)되고 그에 따라 대우(待遇)를 받을 수 있을 정도(程度)로 족보책(族譜冊)이 소중(所重)한 보감(寶鑑)이 되었다.

대동보(大同譜)는 한 씨족(氏族)의 호적(戶籍)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나라의 호적(戶籍)에 등재(登載)되어야 그 나라 국민 자격(國民 資格)과 권리(權利)가 인정(認定)이 되는 것처럼 사람이 태어나서 한 씨족(氏族)의 대동보(大同譜)에 등재(登載)되지 않으면 정통 씨족(正統 氏族)으로 인정(認定)되지 않으며 또한 권리(權利)도 향유(享有)하지 못해 온 것이 우리의 종족사(種族史)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족보(族譜)를 소중(所重)하게 생각(生覺)하고 오래 오래 이를 소장(所藏)하고 있는 것을 가문(家門)의 영광(榮光)으로 여기고 또 자부심(自負心)을 가지고 있다. 자기 가문(自己 家門)의 위상(位相)을 높이기 위(爲)하여 많은 종문(宗門)들은 자기 가문(自己 家門)의 자랑스러운 명조(名祖)가 계셨음을 족보(族譜)에 기록(記錄)하고 표시(表示)하여 명문(名門)임을 입증(立證)하고 있다.

우리나라 족보(族譜)에 관하여 살펴보면 고려 숭의회(高麗 崇義會)(사단법인)(社團法人)에서 편집(編輯)한 려말(麗末) 충의열전(忠義列傳)이란 책(冊)에 “고려조(高麗朝) 공민왕(恭愍王) 말기(末期)에 성리학자(性理學者)로써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내신 운암공(雲巖公) 차원부(車原頫)께서 려흥왕(驪興王) 우왕(禑王) 14년(年) 무진(戊辰 1388)년(年)에 종문(宗門)의 역사(歷史)를 정리(整理)하여 왕씨 차씨 류씨 삼 성(王氏 車氏 柳氏 三 姓)의 보판(譜版)을 판각(板刻)하고 해주 신광사(海州 神光寺)에 보관(保管)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 서울 대학교(大學校) 한국사(韓國史) 교수(敎授)인 한우근선생(韓우劤先生)과 이태진선생(李泰鎭先生) 등이 편저(編著)한 한국문화사(韓國文化史)의 조선 전기편(朝鮮 前期篇)에서도 “현재(現在)까지 밝혀진 바로는 고려 말엽(高麗 末葉)에 해주 신광사(海州 神光寺)에 보판 판각(譜版 板刻)이 보관(保管)되었다는 연안 차씨 족보(延安 車氏 族譜)가 가장 오래된 족보(族譜)이며 우리나라 족보(族譜)의 효시(嚆矢)라고 기술(記述)하고 있다. 박팽년(朴彭年)이 기술(記述)한 차원부 설원기 참조(車原頫 雪寃記 參照) 그후에 연안 차씨(延安 車氏)와 동원(同源)인 문화 류씨(文化 柳氏)가 15세기 초엽(世紀 初葉)에 이른바 영락보(永樂譜)를 만들었으며 15세기 후반기(世紀 後半期)에 안동 권씨(安東 權氏), 양성 이씨(陽城 李氏), 진주 강씨(晋州 姜氏) 등이 잇따라 보첩(譜牒) 또는 세교(世橋)를 엮었다.

이 시기(時期)의 족보(族譜)들은 편간(編刊)의 시기(時期)에 다소 선(先)과 후(後)의 차이(差異)는 있으나 한결같이 가문(家門)의 현달(顯達)이 고려 후기(高麗 後期)에서 시작(始作)하여 당세(當世)에 이른 것을 밝히려는 것이 공통점(共通點)이다.

이러한 글들을 보면 차씨 조상(車氏 祖上)님들의 그 시대(時代)의 권위(權威)와 위상(位相)을 알 수가 있으며 우리의 가문(家門)이 삼한(三韓)의 갑족(甲族)이며 귀족 명문(貴族 名門)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차문(車門)은 신라, 고려조(新羅, 高麗朝)에서 무려 스물 여덟분의 승상(丞相)을 배출한 집안이며 수많은 명조 현조(名祖 顯祖)를 모신 종문(宗門)이다.

우리나라 족보(族譜)를 제일  먼저 만들어낸 선조(先祖)님을 모신 것을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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