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次
Ⅰ. 머릿글
Ⅱ. 연안차씨 종친회 상징물(象徵物)
1. 연안차씨종친회 종기(宗旗)
2. 연안차씨 유래비(由來碑)
3. 연안차씨 종친회 회관(會館)
Ⅲ. 사당(祠堂) 위패봉안(位牌奉安) 전경(全景) 과 선조(先祖)님의 세수(世數)와 명단(名單)
Ⅳ. 연안차씨의 유래비문(由來碑文)
Ⅴ..차씨의 연원(淵源)과 분파도(世系分派圖)
1. 차씨(車氏)의 연원(淵源)
2. 차씨(車氏)의 분파도(分派圖)
Ⅵ. 의덕사(懿德祠)의 사지(史誌)
1. 의덕사 건립의 취지와 목적
2. 의덕사에 위패봉안 선조님 약력(略歷)
Ⅰ. 머 릿 말
연안차문은 5천년의 긴 역사를 가진 유일한 종문이다. 20만 종원을 가진 우리 차문은 시조님과 현조 명조님을 제대로 뫼시지 못하였음을 부끄럽게 생각해 왔다. 지난 천년의 긴 세월동안 정치 사회의 시류에 휩쓸리고 때로는 정치적인 회오리에 휘말려 산골짜기로 바닷가로 숨어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선조님들은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지조 를 지키면서 오늘날 까지 바르게 살아왔고 우리 후손들도 앞으로 수만 년을 조상님의 뜻과 같이 면면히 이어갈 것이다.
그간에 선조님을 잘 배향치 못한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72년에 이 곳 평택 장안동으로 선조님의 선습을 모셔왔으며, 이때부터 성역화 사 업을 추진하여, 1993년부터 사당건립을 시작하여, 1996년 5월에 준공 하고 득관조를 주벽으로 현조 명조님의 위패를 배향으로 봉사해 오다 가 다시 종원의 뜻을 모아 2004년도에 득성시조님을 주벽으로 신라조 의 역대 조상과 고려조의 말기까지 전조상 및 조선조의 명조 (名祖)님 등 102위의 선조님의 위패를 모셔왔으나, 2016년 명조 7위를 더 모셔서 모두 109위의 선조님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이로서 명실 공히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명문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 다. 이 일은 보람 있는 종사이며, 우리 후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요, 과제이기도 합니다. 여기 109위의 선조님에 대한 약력과 차문역사 를 기록하여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한다.
이 같은 훌륭한 사당과 묘역을 갖추기까지 많은 일가분들의 헌성금 과 문중의 지원이 있었음을 잊을 수가 없으며, 전 종원의 이름으로 오 래 기리고자 하는 바이다. 우리 모두 힘을 다시 모아 자손만대로 이 사당과 묘역을 유지 보존하여 명문대족인 차문의 긍지를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연 안 차 씨 종 친 회 중 앙 회 謹識
Ⅱ. 연안차씨 종친회 상징물(象徵物)
1. 연안차씨 종친회 종기(宗旗)

2. 연안차씨 유래비(由來碑) 전경(全景)

3. 연안차씨 종친회 회관(會館) 전경(全景)

Ⅲ. 사당(祠堂) 위패봉안(位牌奉安) 전경(全景)과 선조(先祖)님의 세수(世數)와 명단(名單)


Ⅳ. 연안차씨 유래비문(由來碑文)
황제(黃帝)의 후손인 사신갑(姒辛甲)께서 고조선 평양 일토산(一土 山) 아래에 살면서 성을 왕씨(王氏)로 하고 이름은 조명(祖明)이라 하 였다. 고조선 말 그의 후손 왕몽(王蒙)이 기자조선 준왕(準王)의 모함을 받아 7남 왕림(王琳)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살게 되었 다. 이때 몽(蒙)은 자손번창을 이유로 왕씨(王氏) 성자(姓字)를 전자(田 字). 신자(申字). 차자(車字)로 고쳐 성을 차씨(車氏)로 하고 이름은 무 일(無一)이라 하였다.
신라태조가 계림(鷄林 =慶州)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때 차무일 (車無一)께서 공훈(功勳)을 세워 시중벼슬에 오르고, 차씨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
차무일의 32세인 건신(建申 일명 건갑(建甲))께서 신라39대 소성왕 때 승상벼슬에 있었는데, 소성왕께서 태자를 잘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승상께서 왕의 유언에 따라 12세로 보위(寶位)에 오르신 애장왕을 보필 하시다 가 아들 승색(承穡)에게 다시 왕을 보필할 것을 부탁하고 별세 하시니, 왕께서 왕례로서 기장 만화동에 예장케 하였다.
이때부터 차능(車陵)이 라 칭하게 되었으며, 기장현도 차성(車城)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또한 신위도 소성 왕 종묘에 배향 하였다. 그러나 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반역하여, 왕 위를 빼앗아 스스로 헌덕왕이라 하였다.
차승색(車承穡)께서는 충성심에서 아들 차공숙(車恭叔)과 더불어, 헌 덕왕(憲德王)을 암살하려다 누설되었다. 이로인하여, 아들을 데리고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 류씨(柳氏)로 변성(變姓)하고 이름을 백(栢)으로 아들은 숙(淑)으로 개명(改名)하고 살았다.
둘째아들 차공도(車恭道)는 강남으로 피신하여 구성(舊姓) 왕씨(王氏)로 복성 하였는데, 이 분이 고 려 태조 왕건(王建)의 증조(曾祖)이신 원덕대왕(元德大王)이시다.
이러한 인연으로 차씨는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고려조의 차씨는 왕 씨와 똑 같은 왕족 대우를 받았다. 고려태조 왕건께서 후삼국을 통일할 때 류씨(柳氏) 6세 인 류해(柳海)께서 장정을 수송하여 통일에 기여 하였음으로 삼한통합 벽상2등공신에 봉(封)해 졌고, 특별히 차로서 달성하였다는 의미로 세적지명(世積之名)인 차달(車達)을 내려주셨다.
큰 아들 류효전(柳孝全)에게는 통일에 필요한 향 궤(餉饋)를 헌납 하였기에 개국 수공자로 대광(大匡)의 벼슬을 제수하고, 귀족(貴族)의 작위(爵位)인 백(伯)에 봉(封)하였으며, 왕실종적(王室宗籍) 에 입적(入籍)한 후 그 조상의 본성인 차(車)씨를 주었다. 또한 염주(塩州 :延安)에 식읍천호(食邑千戶)를 내렸고, 그 후손들은 연안군(延安君)으로 추존(追尊)하며 득관조(得貫祖)로 받들고 있다.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의 둘째아들 효금(孝金)은 류씨(柳氏)를 승습하였다. 이때부터 두 형제분이 차. 류 두성으로 분성(分姓) 되었다.
차 문은 신라, 고려조에 수많은 문무장상(文武將相)이 대를 이어 배출된 교목세가(喬木世家)의 명문(名門)이다. 고려 공민왕 때 군부판서 용산군(龍山君) 차포온(車蒲溫)은 고려가 원(元)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때 국방 및 외교로 뛰어난 활약을 하신 고려의 명신이며, 차문의 자랑스러운 현조이시다.
또 불의에 굴하지 않 았던 고려 말 성리학의 대가이시며, 고려조 간의대부(諫議大夫)이신 운 암(雲巖) 차원부(車原頫)께서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와 하륜 등 사얼(四孼)들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추살(椎殺)되시고, 차씨 문중도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태조의 질책(質 責)으로 태종이 잘못을 뉘우치고 공(公)의 씁혼을 위로하는 치제(致祭) 를 명하고, 아울러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벼슬을 추증했고 그 후 가증 문하시중(門下侍中)과 문절(文節)이란 시호(諡號)도 내렸다.
다행히 세조2년에 왕명으로 박팽년(朴彭年)의 기문(記文)에 최항(崔 恒)외 4인의 주석문(註釋文)과 유신석학(儒臣碩學) 48인의 응제시(應製 詩)를 모아 예조참판 하위지(河緯地)의 서문을 지어 엮은 차원부 설원기(車原頫 雪寃記)에 의하여 억울한 사실이 소명되어 광명을 찾기는 하였으나, 차씨 문중에 대한 수난은 계속되었다.
그러나,차씨 문중에서는 세조 13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창의(倡義)하여, 순절(殉節)하신 강열공(剛 烈公) 차운혁(車云革), 임진왜란 시 평양성 수복의 로포문(露布文)으로 명나라를 놀라게 한 천하문장 오산공 차천로(車天輅)와 같은 명조 현 조님들이 많이 계셨다.
근대에는 포우단(砲牛團)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신 차도선(車道善), 대동공보(大同公報)를 창간, 독립운동을 하신 차석보(車錫甫),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큰 활약을 하신 차이석(車利錫)외 많은 독립유공자에게 정부 건국 훈장이 수여 되었으며, 이 분들이 차씨 문중을 빛내고 있다. 차씨 문중은 절개 굳은 충신. 공신. 의사와 열사가 유달리 많 은 종문이며 명문 갑족다운 긍지를 잃지 않고 자자손손(子子孫孫) 계승(繼承)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해(註解)
교목세가(喬木世家) : 여러대에 걸쳐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 집안
Ⅴ. 차씨의 연원(淵源)과 분파도(分派圖)
1.차씨(車氏)의 연원(淵源)

차씨(車氏)의 근원(根源)을 원파록(源派錄)과 역대(歷代) 문헌(文獻)에 의거(依據) 정리 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4700년 전 BC. 2704년에 중국에서 헌원(軒轅)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황제(黃帝)로 즉위(卽位)를 하셨는데, 황제(黃帝)의 본성(本姓)은 공손 씨(公孫 氏)이시며, 이름은 탄생하신 지명(地名)에 따 라 헌원(軒轅)이라 한 것이다.
이 시대(時代)는 모계(母系)의 사회(社會)였음으로 황제(黃帝)께서는 모후(母后)에게 성(姓)을 지어 드렸는데, 본래 모후(母后)께서 희수(姬 水)의 강변(江邊)에 살았으므로 희씨(姬氏)라는 성(姓)을 지어 받치고, 황제(黃帝)도 모후(母后)의 성(姓)을 따라 성(姓)을 희씨(嬉氏)로 바꾸 었고 토덕(土德)으로 제위(帝位)하여 황제(黃帝)라 부르도록 하였다.

황제(黃帝)께서는 희씨(姬氏)로 계승(繼承)하여 맏아들 소호(小昊), 둘째아들 창의(昌意)를 두시었고. 소호(小昊)는 아들 교현(橋玄)을 두시 었고, 교현(橋玄)은 아들 제곡(帝嚳)을 두시었고, 제곡(帝嚳)은 아들 4 형제를 낳으시니 페제지(廢帝址), 당제요(唐帝堯), 상조계(商祖契), 주조 기(周祖棄)이시며, 황제(黃帝)의 둘째 아들 창의(昌意)는 아들 전욱(顓 頊)을 두시고, 전욱(顓頊)은 아들 4형제를 낳으시니 궁선(窮蟬), 곤( 鯀), 숭백(崇伯), 백익(伯益)이시며, 궁선(窮蟬)은 아들 구망(句望)을 두시었 고, 구망(句望)은 아들 교우(橋牛)를 두시었고, 교우(橋牛)는 아들 고수 (瞽瞍)를 두시었고, 고수(瞽瞍)는 아들 우제순(虞帝舜)을 두시었는데 이 분이 순(舜)임금이시며, 전욱(顓頊)의 둘째 아들 곤( 鯀)은 아들 하후씨 우(夏后氏禹)를 낳으셨다.

순(舜)임금은 하후씨우(夏后氏禹)에게 선위(禪位)를 하시고 ,성(姓)을 사씨(姒氏)로 사성(賜姓)을 하시었고, 하후씨우(夏后氏禹)는 즉위(卽位) 를 하시고 하(夏)나라를 세우시고, 홍수(洪水)를 다스리는 치수사업(治 水事業)을 성공적(成功的)으로 이루어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 으며 이로부터 사씨(姒氏)로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게 되었다.
하후씨우(夏后氏禹)는 아들 계(啓)를 두시었고, 계(啓)는 아들 두 형 제를 낳으시니 태강(太康), 중강(仲康)이시며, 계(啓)의 둘째 아들 중강 (仲康)은 아들 상(相)을 두시었고, 상(相)은 아들 소강(少康)을 두시었 고, 소강(少康)은 아들 저(杼)를 두시었고, 저(杼)는 아들 망(芒)을 두시 었고, 망(芒)은 아들 설(泄)을 두시었고, 설(泄)은 아들 불강(不降)을 두 시었고, 불강(不降)은 아들 3형제를 낳으시니 경(扃), 공갑(孔甲), 신갑 (辛甲)이시며 이3형제는 하후씨우(夏后氏禹)의 11세의 손자이며, 공갑 (孔甲)께서는 왕이 되시었고 귀신(鬼神)을 섬기기를 지극히 좋아 하시 었다.

이때에 하(夏)나라의 국운(國運)이 점점 기울어져 가는 어느 날 난데 없는 용(龍) 한 쌍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공갑(孔甲)왕께서 매우 기 이하게 여기시고 도당(陶唐)의 후손인 유루(劉累)라 하는 신하에게 어 용(御龍)이란 성을 하사(下賜)하시고 그 한 쌍의 용을 잘 기르도록 명 (命)을 내리시었다.
유루(劉累)는 왕명(王命)을 받들고 정성껏 용을 기르는데 왕제(王 弟)이신 사신갑(姒辛甲)께서 이를 신기하게 여겨 힘과 정성을 다 하여 유루(劉累)와 함께 용을 길 들려서 사육을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암 용이 우연히 죽어 버렸다.
유루(劉累)와 신갑(辛甲)은 용을 죽인 죄로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이 를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죽은 용으로 젓갈을 담구어서 왕의 수랏 상에 올리었더니 왕(王)은 그 젓갈의 맛이 좋아서 맛있게 잡수었으며, 그 젓갈을 다 잡수신 왕께서는 더 젓갈을 원하여 찾으시니 유루(劉 累)와 신갑(辛甲)은 더 구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왕께서 용의 젓갈인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음니다.

이에 유루(劉累)는 노(魯)나라로 도주(逃走)해 버리자, 신갑(辛甲)께서는 혼자 중벌(重罰)을 받으실까 더욱 두려운 나머지 요수(遼水)를 건 너 동국(東國)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亡命)하시니, 이때가 BC.1878 년이었다.
사신갑(姒辛甲)께서는 고조선(古朝鮮)의 평양(平壤) 일토산 (一土山) 아래에 정착(定着)하여 사시면서, 산의 이름 일토(一土)를 합 하여 왕자(王字)를 만들어 성(姓)으로 정(定)하여, 왕씨(王氏)로 하고 이 름은 조명(祖明)으로 개명(改名)하시었다.
왕조명(王祖明)께서는 근원(根源)의 조상(祖上)이 중국(中國) 황제(黃 帝)임으로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뛰어 나시어, 당시(當時) 단군조선 (檀君朝鮮)의 조정에서는 공(公)을 흠모(欽慕)하여, 치민장(治民長)으로 추대(推戴)하시니 이에 단군조(檀君朝)를 도와 치민치정(治民治政)에 힘쓰시게 되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띠를 베어 지붕을 덮게 하고 땅을 갈아 오곡(五穀) 을 재배하며 방아를 찧어 밥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 보급하였고, 남녀를 구별하여 차례와 예(禮)의 범절(凡節)을 가르치시며, 삼강오륜(三綱五 倫)으로 백성을 교화선도(敎化善導)를 하시었고, 그 후손인 왕수긍(王 受兢)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원년(元年) 기묘(己卯)에 기자(箕子)가 동쪽 땅에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 :일설(一說)에는 한씨조선(韓氏朝鮮))을 세우 고 팔조교(八條敎)를 만들고자 하니, 풍토(風土)가 달라 국내(國內)에서 현존자(賢尊者)를 얻고자 하니 백성들이 왕수긍(王受兢)을 천거(薦擧) 하여 기자(箕子)는 왕수긍(王受兢)을 교민사사(敎民士師)로 명(命)하게 되었고 공(公)은 팔조교(八條敎)를 만들어 예락(禮樂), 문물(文物), 의관 (衣冠), 법도(法道)로 백성을 교화(敎化)하고 풍속(風俗)을 이루니 기자 (箕子)가 기뻐하였다.
왕조명(王祖明)의 58세 휘 몽(諱 蒙)에 이르렀을 때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말엽(末葉)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왕검성(王儉城 : 지금의 평양성)을 버리고, 남천(南遷)하여 마한(馬韓)의 도읍지(都邑地)인 금마(金馬 :지금 전라북도 익산군)에 숨게 되었는데, 이 무렵「일토초가자위왕(一土草家者爲王)」이란 참언(讖言)이 있었는데 이 말은 일토초가(一土草家)는 몽자(蒙字)의 파자(破字)임으로 즉(卽) 왕몽(王蒙)이 왕이 된다는 뜻이며 이러 한 참언(讖言)이 동요(童謠)로 세상에 떠도니 기자준왕(箕子準王)이 이를 두려워하여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살고 있는 왕씨(王氏)들을 모두 잡아 죽이라는 어명(御命)을 내림으로 왕몽(王蒙)께서는 다급한 나머지 팔형제 아들 중에 일곱째 아드님이신 왕림(王琳)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신(避身)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들어 가 자취를 감추고. 은거(隱居)하여 10여년의 피신(避身)의 고난(苦難)을 격고 살았다.
그러나, 어느 날 신인(神人)이 감응(感應)하시어,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큰 소리로 외치며 가로대 “너의 성(姓)인 (王字)를 세 번 글자를 고쳐 세 번째 글자로 성(姓)으로 정(定)하면 이 고난(苦難)을 모면(謀免)하고 자손(子孫)이 크게 번영(繁榮)할 것이다.” 라고 예시(豫示)함으로 왕몽(王蒙)께서 즉시(卽時) 왕자(王字)에 동서 (東西)를 막아 전자(田字)로 또 다시 전자(田字)에 중획(中劃)을 상하 (上下)로 이어 신자(申字)로 또 다시 신자(申字)에 천지양획(天地兩劃) 을 가(加)하여 차자(車字)로 하고 이에 차자(車字)로 성(姓)으로 정(定) 한 후 무(無)의 허공(許空)에서 다시 하나로 시작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무일(無一)로 개명(改名)하시였다. 또한, 아들 왕림(王琳)은 신인(神人)이 예시(豫示)할 때 두 번째라 하여 이름을 신을(神乙)이라 개명(改名)하신 후 지리산(智異山)에서 은둔(隱遁)의 피신생활(避身生活)을 탈피(脫皮)하고, 지리산(智異山)에서 떠나 교남(嶠南)의 계림(鷄林 : 지금 慶州)으로 이거(移居)를 하였다.
주석(註釋): 위만(衛滿) : 중국 진(秦). 한(漢)의 교체기에 연(燕)나라 사람으로 무리를 거느리고 기자조선 준왕에게 투항하였다가 그 뒤 준왕을 쫓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웠으며 우거왕(右渠王) 때 3대의 88년 만에 한(漢)나라 무제(武帝)에게 망하였다.
BC.59년경에 부족(部族)의 6촌 촌장(村長)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王)으로 추대(推戴)함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임금으로 즉위(卽位)하시어 계림(鷄林)으로 도읍(都邑)을 천도(遷都)하시어 신라(新羅)를 개국(開國)하실 때 차무일(車無一)께서 신라 태조(太祖)이신 박혁거세(朴赫居世)에게 지리산(智異山)의 영주권(領主權)을 내어 주시고 임금으로 섬기어 큰 공훈(功勳)을 세우시니 신라 태조께서 벼슬 시중(侍中)을 제수(除授)하시고, 차문(車門)의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고, 아들 차신을(車神乙)이 또한 신라조(新羅朝) 에 승상(丞相)의 벼슬을 하였다.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의 17세 손자 차제능(車濟能)은 신라 미추왕조(味鄒王朝)에 벼슬 승상(丞相)이시며, 득성시조(得姓始祖) 의 21세 손자 차휘만(車徽曼)은 신라 19대 눌지왕조(訥祗王朝)에 벼슬 이 승상(丞相)으로 눌지왕(訥祗王)의 부왕(父王)이신 내물왕(內勿王)의 동생인 실성왕(實聖王)이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는 내물왕(內勿王)의 장자(長子) 눌지(訥祗)는 도외시(度外視)하고 내물왕의 둘째아들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질(人質)로 보내고 셋째아들 미사흔(米斯欣)은 왜국(倭國)으로 인질(人質)로 보내버렸다.
이에 박제상(朴提上)이 주축(主軸)이 되어 신자천(申自天). 차휘만(車徽曼). 배중량(裵仲良) 등이 실성왕(實聖王)의 부당(不當)한 처사(處事)를 거론(擧論)하여 실성왕(實聖王)은 내물왕(內勿王)의 장자(長子) 눌지(訥祗)에게 선위(禪位)를 하였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卽位)하신 뒤에 일본(日本)에 억류(抑留)된 아우를 그리워하며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귀환(歸還)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하였다.
이에 승상(丞相) 차휘만(車徽曼)이 박제상(朴提上)과 함께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으로 건너가시어, 왜왕(倭王)에게 신라조(新羅朝)의 왕제(王弟)인 미사흔(米斯欣)을 신라로 귀환(歸還)을 청(請)하였으나 왜왕(倭王)이 거절(拒絶)을 하였다.
승상 차휘만(車徽曼)은 승상 박제상(朴提上) 등의 사신(使臣) 은 논의(論議)하고 어느 날 밤에 왕제(王弟) 미사흔(米斯欣)의 숙소(宿所)를 지키는 왜인(倭人)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은밀히 도해구출(渡海救出)을 시킨 뒤에 무사히 신라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하여 승상 차휘만(車徽曼)과 박제상(朴提上)은 왕제(王弟) 미사흔(米斯欣)이 감금(監禁)된 숙소(宿所)의 방문(房門) 앞을 지키고 앉아 있으면서 감금(監禁)의 왜인(倭人)들에게 왕제(王弟) 미사흔(米斯欣)이 아직 취침(就寢)하고 있다 속이며 무사히 신라로 귀환(歸還)을 시키었다.
이 사실이 밝혀져서 일본의 왜왕(倭王)이 진노(震怒)하여 문책(問責)하니 승상 차휘만(車徽曼)과 박제상(朴提上)은 왜왕(倭王)에게 굴복(屈服)하지 않으시고 일본(日本)에서 순절(殉節)하시었다. 이 사실은 동사(東史)에 기록 되어 있다.
득성시조(得姓始祖)의 32세 손자 차건신(車建申)께서는 신라 39대 소성와조(昭聖王祖)에 원로승상(元老丞相)으로 소성왕(昭聖王)은 친(親)

이 공(公)에게 중국의 주(周)나라 주공(周公 : 주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 무왕(武王)의 아들이며, 어린 조카인 성왕(成王)을 등에 업고 제후(諸侯)들과 조회(朝會)를 하는 그림 족자(簇子)를 내리시면서 어린 태자(太子)를 잘 보필(輔弼)할 것을 부탁을 하였는데 이것은 종실(宗室)의 왕족(王族)이 강세(强勢)하고 12세에 어린 세자(世子)에게 선위(禪位) 하는 것이 몹시 불안하여 원로승상(元老丞相)에게 유언(遺言)을 남긴 것이다.
서기800년 경진(庚辰)에 소성왕(昭聖王)이 서거(逝去)하시고 세자(世子)는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卽位)하시니, 신라 40대 애장왕(哀莊王)이시며 승상(丞相) 차건신(車建申)은 애장왕(哀莊王)의 보상(輔相)이 되시어 애장왕(哀莊王)을 극진(極盡)이 보필(輔弼)하시고 나라의 정사(政事)를 섭정(攝政)을 하시며 나라에 번영(繁榮)의 대훈공(大勳功)을 세우시었다.
득성시조(得丞始祖)의 33세 손자이시고, 승상 차건신(車建申)의 아드님 차승색(車承穡) 신라조(新羅朝)에 출사(出仕)하시니 승상공(丞相公)은 아드님에게 극진(極盡)히 애장왕(哀莊王)에 충성(忠誠)으로 보필(輔弼)할 것을 부탁하시고 어느 날 드디어 별세(別世)하시니, 애장왕(哀莊王)은 만조백관(滿朝百官)에 하명(下命)하시어 승상공(丞相公)의 장례(葬禮)는 왕례(王禮)를 갖추어 기장현(機張縣) 만화동(萬化洞) 측면(側面)의 산록(山錄) 자좌원(子坐原)에 장례(葬禮)를 거행(擧行)케 하였다.

왕례(王禮)에 따라 석관(石棺)과 석봉분(石封墳)을 쌓고 석의(石儀=石物)를 갖추어 세웠으며 신주(神主=位牌)는 소성왕묘(昭聖王廟)에 배향(配享)함으로 세인(世人)들이 승상공(丞相公)의 이 묘역(墓域)을 차능(車陵)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차능(車陵)으로 전(傳)하고 있다.
승상공(丞相公)의 아들이신 차승색(車承穡)은 선고(先考)이신 승상공(丞相公)의 유언(遺言)에 따라 애장왕(哀莊王)을 극진(極盡)히 보필(輔弼)하시었고, 이에 따라 서기 809년 애장왕(哀莊王) 10년에 좌승상(左丞相)으로 승진(昇進)하였으며, 이때에 병부령(兵部令: 군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 병부의 우두머리)으로 있던 애장왕(哀莊王)의 숙부(叔父)인 김언승 (金彦昇)이 섭정(攝政)함을 기화(奇貨)로 마침내 애장왕(哀莊王) 10년 서기 809년에 반역(返逆)을 도모(圖謀)하여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로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고 스스로 즉위(卽位). 헌덕왕(憲德王)이라 칭(稱)하니 이 분이 신라 41대 왕이 된 것이다.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은 헌덕왕(憲德王)을 임금으로 보지않고, 종자(從子 :조카)를 죽인 패륜아(悖倫兒)로 생각하고 애장왕(哀莊王)을 죽인 원한(怨恨)의 격분(激憤)을 참지 못하고, 충의지심(忠義之心)으로 김언승(金彦昇)을 죽이고, 애장왕(哀莊王)의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정통적(正統的) 질서(秩序)를 이어 나라의 기강(紀綱)을 바로잡아 세우기 위하여 굳은 결심으로 좌승상(左丞相)의 큰 아들 신라벼슬 사공(司空)이신 차공숙(車恭叔)과 함께 모책(謀策)을 논의(論議)하고, 옛날에 예양(豫讓)의 모책(謀策)을 본받아 헌덕왕(憲德王)이 수렵(獸獵)하로 나감을 틈타서 다리 밑에 궁수(弓手)의 복병(伏兵)으로 시해(弑害)하고자 하였으나 이 음모(陰謀)를 아는 자가 있어 헌덕왕(憲德王)에게 밀고(密告)함으로 모책(謀策)의 계획(計劃)이 누설(漏泄)되어 헌덕왕(憲德王)의 시해음모(弑害陰謀)는 실패(失敗)하였다.

밀고(密告)로 음모사실(陰謀事實)을 안 헌덕왕(憲德王)인 김언승(金彦昇)은 군병(軍兵)에 체포령(逮捕令)을 내려 차승색(車承穡)과 차공숙(車恭叔)의 부자(父子)를 좇으니 차승색(車承穡)의 부자(父子)는 국운(國運)이 따르지 못함을 한탄하시며 요동백(遼東伯) 김반전(金盤傳)의 아들 김생(金生)의 집으로 도주(逃走)하여 은닉(隱匿)하였다.
차승색(車承穡)의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지 못한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은 차승색(車承穡)의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기 위하여 현상(懸賞)으로 금(金) 천근(千斤)과 식읍만호(食邑萬戶)를 걸어놓고 전국에 수색(搜索)하여 찾으니, 차승색(車承穡)의 생질(甥姪)인 김생(金生)이 현상(懸賞)을 탐하여 외숙(外叔)과 외종(外從)을 밀고(密告)하고자 하니 ,김생(金生)의 충복(忠僕)은 이 사실을 차승색(車承穡)에게 긴밀히 알려서 그날 밤 찰신도주(脫身逃走)하여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아래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에 둔적은거(遁跡隱居) 차승색(車承穡)께서 본성(本姓)을 감추고, 조모(祖母)님의 성(姓)인 양씨(楊氏)로 변성하였다가 양(楊)자와 의미가 같은 류씨로 바끄고 이름도 백(栢)으로 개명(改名)하여 피신(避身)하여 천명(天命)을 보존(保存)한 것이다.

헌덕왕(憲德王) 원년(元年) 서기 810년에 구월산(구월산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에 둔적(遁跡)하여 조모(祖母)의 성(姓)인 양씨(楊氏)로 양자(楊字)와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류씨(柳氏)로 변성(變姓)하고, 이름은 잣나무 숲에 몸을 깊이 감춘다는 뜻으로 백(栢)으로 개명(改名)한 후 유주(儒州)의 부두가(富荳家)에 고용살이를 하시면서 천명(天命)을 보존(保存)하였다.
주해(註解)
유주(儒州) : 고려8대 현종(顯宗)이 1010년에 즉위한 후 유주(儒州)를 풍주(豊州)에 예속(隸屬)하여 유주는 없어졌고, 고려23대 고종왕(高宗王) 45년 1258년에 류경(柳璥)이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됨으로 그에 고향인 옛 유주(儒州) 땅을 승격(陞格)하여 문화현(文化縣)을 만들었던 것이다.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丞穡)의 차자(次子) 차공도(車恭道)는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님의 34세 차손(次孫)인데 아버지와 형을 따라 피란을 가지 못하고 혼자서 강남(江南)으로 도주하여 본성(本姓)을 감추고 옛 조상의 구성(舊姓)인 왕씨(王氏)로 복성(復姓)하여 성명(姓名)을 왕공도(王恭道)라 개칭(改稱)하고 피신(避身)하게 되었는데 이분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증조(曾祖)이시며 고려개국(高麗開國) 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숭(追崇)하시고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이시다. (開城王氏 族譜 參照)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으로부터 류씨(柳氏)로 변성(變姓)하고, 이름 백(栢)으로 개명(改名)하여 류백(柳栢)으로 칭(稱)한 것이 류씨(柳氏)의 시초 (始初)로 그의 아들 차공숙(車恭叔) 은 류숙(柳淑)으로 개명(改名), 그의 아들 휘 진부(諱 振阜), 그의 아들 휘 무선(諱茂先), 그의 아들 휘 보림(諱 普林) 그의 아들 휘 해(諱海)까지 109년간 류씨(柳氏)를 전(傳)하면서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이시였다.

서기 1456년 세조(世祖) 2년(경태(景泰) 7년에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선생께서 조선조(朝鮮朝)의 왕명(王命)에 의(依)하여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이 기술(記述)한 기문(記文)에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 등 제현(諸賢)들이 주석(註釋)을 붙이고 유신석학(儒臣碩學)의 48인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 서문(序文)을 찬(撰)하여 역은 차원부 설원기(車原頫 雪寃記)를 살펴보면, 고려조(高麗朝)에 내사(內史)를 역임(歷任)하신 서희(徐熙)께서 찬집(撰集)한 가사(家史)와 고려 16대 예종(睿宗) 9년(서기1127년)에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이 왕명(王命)을 받아 고려왕실(高麗王室)에서 신라(新羅)의 본계(本系)를 찬술한 서경잡기(西京雜記), 또는 서경야사(西京野史) 및 고려조 장군 김방경(金方慶)이 기술(記述)한 초당일기(草堂日記) 등의 기록을 성삼문(成三問)과 최항(崔恒)이 입증(入證)하였다.
주해(註解)
강남(江南) : 개성왕씨(開城王氏)의 보첩(譜牒)의 문헌(文獻)에 의하면 고려 6대 성종왕(成宗王) 14년 서기955년 7월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10도로 나누면서 대동강의 남쪽(지금의 평안남도)을 강남도(江南道) 하였다. 여기에 기록된 강남은 중국의 강남이 아니고 대동강 남쪽 강남도를 말한 것이다.

<왕명 차원부 설원기> 필사본에 의하면 “司諫院 左正言 車原頫 文城人 柳車達 第1子 大匡之伯 孝全之後也. 車達之於 麗室 輸勤之日 孝全之於 當王事 靡塩之時 輿與原賑貸之栗樹 顯陵 窆社之勞. 國以爲 辦 出車 乘繼粮 道運米 征南 特贈其父 以車爲達 世績之號 別賜 車氏以表 孝全首功之姓而 以食邑千戶之 封仍宗籍延安之地孝全乃穿耳雕靑之後原頫又連軒世族之裔也. 賜姓之申祥在鄭知常西京野史 臣 崔恒 奉敎注 景泰7年(1456年)
즉 세조가 즉위한 해 5월 17일 <왕명 차원부 설원기 필사본(車原頫 雪冤記 筆寫本>가정대부 행 예조참판 하위지 서문(嘉靖大夫 行 禮曹 參判 河緯地 序文) 중에 있는 글이다.
송수경 씨 번역에 의하면“사간원 정좌원 차원부는 문성인 류차달의 제1자 대광지백 효전의 후예이다……중략… 특히 그의 부친에게는 차로서 달성 하였다는 의미의 차달(車達)이란 세적지호(世績之號)를 주었으며 별도로 차 씨로 나타내기 위하여 효전의 수공으로 차 씨의 성을 주고 식읍 천호와 이어 연안을 관향으로 하도록 하였다”.
또한 설원기 214쪽에 있는 이예장 봉 시를 보면
誰遁儒州木兎鄕 新羅丞相後貞良 松原幸未窮冤老 何解鷄林是姓香.
그 누가 유주의 목토향에 숨었는가? 신라의 승상 후예 정량이었다네.
송원에 원한 품은 그 노인이 아니었다면 계림이 관향인 줄 어떻게 알았으리
儒州 文化古縣名 木兎言 柳字破也 後 貞良言 新羅丞相 車濟能 後裔 丞相 承穡後 司空 恭叔 父子也 濟能 羅王 味鄒時 相也. …..중략….. 承穡 高麗 太祖 王建 開國 公 柳車達 五世 祖也 言雖運粮之功而特贈車達之號 原其意則不忘上祖本姓之義也 其子 孝全 子互生 字別賜姓氏 不是也會意也 李禮長 奉 (이예장 봉)
이 시의 의미는 “유주란 문화의 옛 이름이다. 목토(木兎)는 유(柳)자의 파(破)자이다. 후예 정량은 신라 승상 차 제능 후예인 승상 승색과 사공 공숙 부자이다. 제능은 신라 미추왕 때의 정승이시다. 시의 뜻은 ….중략…승색은 고려태조 왕건과 개국공신 류차달의 5대조이다.
비록 군량을 제공한 공로라고는 말하나 특별히 차달이라는 호를 내려 주셨으니 그 원 뜻은 본성을 잊지 않는 것이 의리이다. 그의 아들은 효전인데 자는 생(生)자이며 별도로 성씨를 하사 하였으니 이는 다른 뜻이 아니라 장자로서 윗 조상의 홍열(弘熱)을 이어 받았다는 것이고 또 차달은 본 씨 충정을 드려내려는 뜻이다.(216쪽)“
주해(註解)
판출(辦出) : 변통하여 갖추어 냄
계량(繼粮) : 한 해 농사지은 곡식으로 일 년 양식을 이어감
이 글에 고려태조 왕건(王建)께서 나라를 개국(開國)하여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정(定)하고 남쪽 후백제(後百濟)를 정벌(征伐)할 때 성명(姓名) 류해(柳海)는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로 장정(壯丁)을 모집하여 고려조정에 수송하여 도우시고 그의 큰아들 휘 효전(諱 孝全)은 왕사(王事)에 미고(靡盬)를 당하였을 때 흥원(興原)에 많은 속곡(粟穀)을 진대(賑貸)하였고, 현능(顯陵)과 종사(宗社)를 정할 때 공훈을 세웠고, 나라를 위하여 수레를 판출(辦出)하여 계량(繼粮)을 싫어 남쪽 정벌(征伐)에 미곡(米穀) 운반(運搬)을 행 하였으니 특별히 그의 아버지에게 차로서 달성하였다하여 차달이라는 세적지호를 내렸으며, 그 아들 효전(孝全)에게는 수공(首功)에 대하여 본래의 성 차(車) 성(姓)과 식읍천호(食邑千戶)를 봉(封)하니 곧 종적(宗籍)은 연안(延安)의 땅으로 봉(封)한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의 38세 손자(孫子)인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를 살펴보면 그 원문(原文)에

이 글의 뜻은 “공(公)의 아내는 신라왕 알지(閼智)의 손자 김균(金稛)의 딸이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효전(孝全) 둘째는 효금(孝金)이다. 그 음사(蔭仕)로 봉(封)하여 이어 주는 날에 고려 태조는 특별히 명(命)하여 가로대 옛 차씨(車氏)를 생각하면 본래의 홍렬(弘烈)을 가히 잊을 수 없고, 저간(這間 :이 때까지)에 류씨(柳氏)로
부른 것을 또 버리는 것도 옳지 아니하다. 장자(長子) 효전(孝全)은 윗 할아버지의 홍렬(弘烈)을 이어 받아 차씨(車氏)가 되고, 차자(次子) 효금(孝金)은 류씨(柳氏)를 승습하도록 하였다.” 이에 형제분(兄弟分)이 차씨(車氏)와 류씨(柳氏)로 분성(分姓)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양문(兩門)으로 계승(繼承)하고 있다.
2. 왕씨(王氏).차씨(車氏).류씨(柳氏)등의 분파도(分派圖)

